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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주목 유표에 대한 고찰.2003-09-27 17:34:10
 천공하후패


형주목 유표에 대한 고찰.

머리말.

어떤 인물을 평함에 있어 긍정과 부정이란 양면의 비판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다. 그것은 비단 유표에게만 예외가 되는 것은 아니니 유표란 인물 역시 긍정과 부정이란 양면의 비판 속에 평가가 된다. 그래서 필자가 생각하건데 올바른 평가란 이런 긍정과 부정의 비판 중에 중용을 택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유표란 인물을 평가함에 있어서 이러한 중용을 잃지 않고 바른 자세로서 그를 평하려 하니 부디 좋은 글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1장 난세에 탄생한 형주의 새로운 통치자.

연주 산양군 고평현 사람인 유표는 젊어서부터 팔준이라 불리며 명성을 얻었다. 팔준은 재야에 묻혀 살며 학문에 몰두하던 여덟 명의 은사를 가리키는 말로 <자치통감>과 <후한서> 그리고 <한말경사록>에 기록 되어있다.(하지만 각 기록에 따라 인물이 미묘하게 다르다. 참고로 <삼국지연의>는 <자치통감>의 설을 채용하고 있다.) 한왕실의 종친이었던 그는 이러한 명성을 바탕으로 대장군 하진의 속관으로 있다가 북군중후로 임명되었고 영제가 붕어한 중평 6년(189)에 왕예를 대신하여 형주자사가 되었다.

유표와 형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가 왕예를 대신하여 형주자사가 된 사연은 이러하다.

당시 형주자사 왕예는 장사태수 손견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왕예는 평소에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손견에게 무례하게 행동하고 그를 깔보았는데 손견은 이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영제가 죽고 동탁이 조정을 전횡하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본래 의협심이 강했던 손견은 이것을 기회로 삼고 의병을 일으켰다. 동탁토벌의 기치를 올리며 일으킨 의병이기에 손견은 의병을 이끌고 곧장 낙양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양양군을 지나게 되었고 손견은 평소부터 앙심을 품고 있었던 왕예를 죽였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이후 장사태수는 장흠으로 교체되었고 형주자사는 유표로 교체되었다.

당시 이 일은 반란(혹은 하극상 등)으로 치부됨이 옳겠지만 세상이 혼란스럽고 중앙정부의 힘이 변방에 닿지 못했기 때문에 이 일은 묵과될 수 있었다.

왕예의 죽음으로 인해 형주자사로 부임한 유표는 효산 동족에서 일어난 의병에 의지해 군사를 모아 양양군(당시 자사에게는 군사권이 없었지만 천하가 혼란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고 보여진다.)에 주둔시켰다.(후에 이 군사는 원술과의 대립에서 요긴하게 쓰이니 유표의 조치는 나름대로 현명했다고 보여진다.)

한편 앞서 말한 손견은 왕예를 죽인 이후 그대로 진격하해 남양태수 장자를 죽이고 남양군을 탈취했다. 그리고 노양군으로 진격하여 후장군 원술을 만나게 되었다. 손견은 원술의 세력으로 편입되었고 원술은 손견을 위해서 조정에 표를 올려 포로장군 예주자사로 삼아 자신의 충복으로 삼았다. 이 이후 원술은 풍부한 물자와 수백만에 달하는 호구수를 가지고 있었던 남양군을 차지하여 멋대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세력을 불렸다. 원술은 세금을 징수함에 있어 제한을 두지 않고 멋대로 세금을 거두었기에 백성들의 고통과 원망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형주자사 유표는 이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남양군은 형주에 속한 군으로서 형주자사의 감찰권이 미치는 관할지였다. 하지만 원술이 누구였던가. 사세삼공의 가문에서 배출된 엘리트가 아니었던가. 유표와 원술의 대결은 피할 수 없었다. 유표는 자신의 직무를 수행해야할 의무가 있고 원술은 세력을 불리는데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원술은 초평 3년(192)에 손견을 보내 유표를 공격하게 했다. 이에 유표는 앞서 모았던 군사를 바탕으로 대응했고 그 결과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 전투는 <삼국지 오서 손견전>에 기록되어있는데 그 과정은 아래와 같다.

『초평 3년(192). 원술은 손견을 시켜 형주를 정벌하고 유표를 공격하도록 했다. 유표는 황조를 파견하여 번성과 등성 사이에서 맞아 싸웠다. 손견은 황조를 격파키시고 추격하여 한수를 건너 마침내 양양을 포위했다. 손견은 말을 타고 현산을 순시할 때, 황조의 군사에게 화살을 맞고 사망했다.』

유표는 손견의 군대를 무찌름으로서 형주를 지켜낼 수 있었고 곧 이 소식은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이각과 곽사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각과 곽사는 아군도 늘리고 후방의 지원도 받을 겸해서 유표를 진남장군 형주목에 임명하고 성무후에 봉하고 절을 주었다. 유표는 이것을 기회로 확실하게 형주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강화시켰다.

본래 후한에서는 각 주에 자사를 두어 주 내부의 군행정을 감찰하게 했다. 그래서 자사는 주내부를 돌아다니며 여러 지역을 순시하고 감찰하면서 주의 행정을 바로잡았다. 그러나 실질적인 행정권과 군사권은 없기에 때로는 태수의 영향력에 눌리어 그 업무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때도 있었다. 이랬던 자사가 영제에 이르러서는 주목이 되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쥐어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영제 시절에는 이러한 자사와 주목을 같이 두어 자사에게는 주내부의 감찰권을 주었고 주목에게는 행정권과 군사권을 주어 주를 꾸려나가게 했다.

이러니 형주목이 된 유표는 형주 전체에 대해 행정권과 군사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진남장군이 되어 중앙정부와의 군사적 연계를 꾀할 수 있었으며 절까지 부여받아 그 권한이 명백해졌다. 비로서 유표는 난세로 치닫는 세상에 당당한 군벌로 세력을 잡을 수 있었다.

시간은 흘러 건안 원년(196년)에 조조는 천자를 받아들여 허창에 수도를 세웠다. 바야흐로 당시는 조조와 원소가 중원의 패권을 놓고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군웅으로 성장한 유표는 세태를 바라본 이후 사자를 보내 천자에게 공물을 바치는 한편 원소와 동맹을 맺었다. 이 선택을 치중종사였던 등희가 반대했지만 유표는 듣지 않았다.(여담이지만 등희는 이 일을 계기로 하야를 한 이후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할 때 나타나 조조의 정권에서 시중이 되었다.) 이 선택은 훗날 조조와의 악연으로 변하게 된다.

여기서 잠시 유표가 왜 이러한 선택을 했는지 알아보자. 이 선택은 유표가 지닌 성향과 앞으로의 미래를  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되니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된다.

당시 후한의 식견있는 인물 중 조조의 영웅성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하옹과 교현 그리고 허소는 그가 난세를 평정할 인물이라는 평을 내렸고 순욱과 곽가 등은 조조와 원소를 비교하며 조조의 영웅성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런데 유표는 이러한 세인들의 평가와 등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왜 원소를 택했던 것일까. 그것은 유표가 유학자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원소는 사세삼공의 집안이란 든든한 배경과 반동탁연맹의 맹주였다는 관록이 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기주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에 비해 조조는 환관의 자손이었고 반동탁연맹에서는 기것 아랫자리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세력도 크지 않았다. 이러니 비록 명분이 조조에게 있다고 하나 실세는 원소에게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유표는 가문과 명성을 중시했던 전형적인 유가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각지에는 군웅들이 활개를 쳤다. 이런 세상에서는 강력한 군사력과 탄탄한 통치력 그리고 풍부한 인재가 있어야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표는 어느정도 살아남을 가능성을 지닌 자였다. 그리고 이러한 유표의 상황은 두가지 일을 겪으며 생존가능성을 좀 더 공고히하게 된다.

동탁의 잔존세력 중 장제란 인물이 있다. 그는 동탁의 정권이 붕괴되고 여포와 왕윤이 중앙정부의 실권을 잡자 이각과 곽사와 함께 군사를 모아 왕윤을 죽이고 여포를 패하게 하여 중앙정부를 독점한 인물이었다. 그는 군사를 일으킨 이후 표기장군 평양후가 되어 홍농에 군사를 주둔했는데 워낙 세상이 혼란스럽고 갑작스럽게 군사를 움직였던 지라 사졸들은 많고 식량이 적어 곧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형주의 국경지대에 있는 양성을 침략했는데 양성을 공격하던 도중 화살에 맞고 죽고 말았다.

곧 이 사실은 유표에게 알려졌고 유표는 긴급히 장제의 군사들을 받아들여 장제의 조카인 장수로 하여금 항복해온 군사들을 이끌어 완성에 주둔하게 하였고 곧 자신에게 복종하며 동맹을 맺게 했다. 이로 인해서 유표의 군사력이 강화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군사력을 키우게된 유표에게 또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장사태수 장흠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반란이 어떻게 기회가 될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있겠지만 반란은 진압만할 수 있다면 세력내의 분복분자들을 축출해낼 수 있고 세력의 유대감 등을 돈독히 할 수 있으며 그 세력권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에 반란은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기회가 된다. 장사태수 장흠의 반란 역시 새로운 기회였다. 유표는 이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 군사를 동원했고 몇년이 지나 장사군을 함락시켰다. 유표는 내친김에 영릉군과 계양군을 점령하고 다시 북으로 군사를 돌려 한천을 점령했다. 그 결과 형주는 완전히 유표의 직접적인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다스리는 영토는 수천리요 군사는 수십만이니 비로서 유표는 천하를 호령하는 당당한 군웅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난세에 탄생한 새로운 형주의 통치자 유표였다.


2장 난세를 바라보는 형주에 웅크린 방관자.

군벌에서 군웅으로 성장한 유표에게는 반드시 해결해야하는 난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하의 패권을 쥐고 대결하는 조조와 원소 중 누구를 지원하며 천하의 대세를 관망하는 가였다. 유표는 앞서 원소와 동맹을 맺음으로서 원소를 지지하는 듯 했지만 군웅으로 성장한 이후에는 세태를 관망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삼국지 위서 유표전>에는 유표의 입장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건안 5년(200).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대치하던 중에 원소는 사람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는데, 유표는 그것을 허락했지만 가지는 않았고, 또 조조를 돕지도 않고 장강과 한수 일대 지역을 지키며 천하의 형세가 변화하는 것을 관망했다.』

당시 세상의 여론은 조조와 원소에게로 갈려 팽팽하게 맞섰지만 유표의 진영은 전적으로 조조에게 집중되어있었다. 종사중랑인 한숭과 별가종사인 유선이 유표에게 한 진언을 보면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서 유표전>을 인용하여 그들의 말을 전하면 아래와 같다.

『"호걸들이 서로 다투고 두 영웅이 대치하고 있으니, 천하의 중대한 입무는 장군에게 달려 있습니다. 장군이 큰 일을 하려고 한다면, 군대를 일으켜 그들의 쇠약함을 이용하시면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장군께서 따로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장군은 십만대군을 갖고있으면서 편안히 앉아 그것을 관망하며, 현명한 사람을 보고도 돕지 않고, 사람들이 조정하여 화해시기키를 요청해도 하지 않고 있으니, 이 양쪽의 원망은 반드시 장군에게로 집중될 것이며, 장군은 중립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조조는 명찰함에 의지하므로 천하의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습니다. 그 추세를 보니, 반드시 원소는 공격한 이후에 병사를 일으켜 장강, 한강 일대를 공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마 장군은 대항하여 싸울 수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장군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모든 주를 인솔하여 조조에게로 귀순하는 것만 못합니다. 조조는 반드시 장군에게 깊이 감사할 것입니다. 장군은 영원히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고, 후대에까지 전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안전한 책략입니다."』

이미 유표의 진영은 조조에게로 마음이 기우러져 있었다. 하지만 유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원소의 세력과 조조의 명분 사이에서 갈등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그렇기에 대장군 괴월이 권함에도 그것을 무시하고 한숭을 조조의 진영으로 보내 세력의 허실을 살폈던 것이다.

당시 유표는 칼자루를 쥐고 있는 상태였다. 만일 그가 조조를 선택하여 형주의 모든 물자를 조조에게 지원했다면 분명 유표는 열후에 봉해지고 그의 세력은 귀족화가 되어 존속되었을 것이고 보다 손쉽게 원소를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그가 원소를 선택하여 원소를 지원해 조조를 공격했다면 필시 조조는 유표와 원소의 물량을 이기지 못하고 패했을 것이다. 게다가 시기까지 조절하여 공격을 한다면 원소의 세력까지 도모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표는 관망을 택했다. 자신에게 항복을 했던 장수와 같은 이들은 일찌감치 조조를 선택해 항복했는데 왜 유표는 망설였던 것일까?

사실 유표는 본래 군웅의 그릇이 아니었다. 비록 그가 한왕실의 종친이란 명분을 가지고 여러가지 여건에 의해서 강력한 군벌세력으로 성장했다고 하나 그는 태생이 학자였다. 그것도 유학을 전공한 학자였기 때문에 유표에게서는 실리주의나 법치주의, 현실주의적인 모습보다 덕치주의, 이상주의적인 모습이 더 부각되었다. 유표는 젊어서 팔준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명성을 알린 인물이며 역(주역)에 주해서를 달 정도로 깊은 학식을 지녔던 자였다. 유표의 이상주의적인 모습은 그가 다스렸던 형주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유표가 형주목이 된 이후 그는 학문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쳐 형주를 학자들의 유토피아로 만들려는 노력을 했다. 유표의 이러한 정책 덕에 중원에서 벌어지는 전란의 소용돌이를 피해 도망쳐온 많은 학자들이 형주에서 활동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마휘나 방덕공 등은 이렇게 도망쳐온 학자들 중 대표적인 명사들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꽃피운 형주의 학문은 다른 지역과 달리 독특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경학의 간결화였다. 미국의 유명한 중국학자 여영시 교주는 형주의 학문을 고문경학과 금문경학을 종합함으로서 경학의 간소화를 도모했던 후한의 정현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주장한 것(사상으로 읽는 삼국지 176p 참고)을 보면 이 형주의 학문이 얼마나 세련되고 발전되었던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는 모두 유표의 노력 덕분이었다.(유표는 또 형주의 여러 학자들을 초빙하여 <후정>이란 오경의 주석집을 펼치는 활동도 하였다.)

이런 학자적인 성향이 강하다보니 대세를 관망함에 있어서 현실을 직시하기 보다도 이상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앞서 원소와 동맹을 맺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조조의 승리를 많은 신하들이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있기에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현실로서의 안주도 한몫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유표의 망설임은 세태의 관망이라는 그의 입장을 고수하게 했으며 그후 팔 년 동안 형주에는 일시적인 평화가 주어졌다. 풍전등화라고 했던가. 유표와 형주가 바로 그러했으니 이 이야기는 후계자의 문제에서 좀더 상세히 다루도록 하자.  


3장 준비되지 못한 후계자 선정과 몰락.

유표의 선택으로 세태의 관망이란 입장을 고수하게 된 형주는 일시적인 평화를 만끽하게 된다. 관망이라는 입장을 충실하게 수행한 유표는 조조에게 패해 자신에게로 의탁해온 유비의 세력을 흡수하고 보다  공고히 관망의 입장을 굳히게 되었다.

세력이 안정화가 될 무렵에 자연스럽게 불거져 나오는 문제는 단연 후계자 문제이다. 난세일수록 후계자의 문제는 중요하게 작용된다. 당장 내일 아침에 어떻게 형세가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바른 후계자를 선정하여 후사를 대비하는 것은 세력의 장기화에 있어서 필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표는 분명 이러한 점에서 실패를 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장남인 유기를 놔두고 차님인 유종을 후계자로 선택했던 것이다. 그는 유종을 위해서 채모와 장윤을 중심으로하여 유종을 지지하는 도당을 형성했으며 유기를 강하태수로 보내 외직을 맡게해 후계자를 유종으로 굳혔다.

이러한 선택은 지지세력의 양분이라는 폐단을 낳았다. 유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세력은 대부분 친조파였다. 그에 비해서 유기는 반조파인 유비의 세력과 깊은 친분이 있었다. 유기가 살 수 있는 방책을 마련한 것도 유비 세력의 참모인 제갈량이었다.(<삼국지연의>에서 친조파의 대표적인 세력가인 채모와 반조파인 유비와의 대결구도를 제시하고 있는 점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렇듯 유종과 유기는 각각 다른 성향을 지닌 세력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세태는 곧 형주세력이 두 개로 갈렸다는 것을 의미한다.(후에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고 유비가 강릉으로 도주할 무렵 그를 따르는 관리가 수십이요 병사가 10만인 것은 이러한 세력의 양분과 무관하지 않다.)

유표는 후계자를 선정함에 있어서 장자를 세운다는 원칙을 무시하고 애정으로서 유종을 택했으니 이는 후계자를 세우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유표가 유기를 강하태수로 세웠다는 기록을 보면 유기는 이미 청년으로서 후계자가 될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유표는 이러한 유기를 놔두고 어린 유종을 후계자로 지목하여 그를 위해 도당까지 세우니 이는 군웅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 된다.

이런 어린 유종이다 보니 유표가 죽은 이후 유표의 시절부터 형주를 관리했던 고신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고 그대로 수용하여 결국 아비가 이룬 기반을 고스란히 조조에게 바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는 모두 유표의 후계자 선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유종이 청주자사가 되고 괴월, 부손, 한숭, 등희, 유선 등이 조조 정권에서 벼슬을 받고 관내후에 봉해진다고 한들 이 어찌 형주시절의 영광에 비할 수 있겠는가.


외장. 숨겨진 유표 세력의 전쟁기록.

본장에서는 논외로서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던 유표 세력의 전쟁기록을 이 편에서 다룰려 한다.

첫번째 기록은 황조와 손씨의 대결이다. 황조에 대해서는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는데 그는 바로 손견을 죽인 장본인이다. 처음 손견이 원술과 결탁하여 형주에 처들어 왔을때 군사를 이끌고 가서 우여곡절끝에 손견을 죽인 황조는 이 일을 계기로 손씨와의 악연을 쌓게 된다. 이 악연은 손책의 시절에서는 들어나지 않다가 손권이 정권을 잡은 이후 들어났는데 손권이 정권을 잡자마자 했던 일은 다름이 아니라 황조를 토벌하여 아버지 손견의 복수를 하는 일이었다. 건안 8년(202년)부터 13년(208)에 까지 무려 3차례에 결처 교전이 일어났고 결국 황조는 손권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이것이 들어나지 않은 황조와 손씨의 대결이다. 당시 황조는 강하태수였는데 이 황조의 죽음으로 인해서 유기가 강하태수로 부임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어찌보면 운명과 같은 일이다.

두번째 기록은 유반과 태사자의 대결이다. 유반은 유표의 조카로서 매우 용맹한 장수였다. 그는 손권이 관할하는 애현과 서안 등의 현에 자주 출몰하여 공격을 했는데 이때가 어림잡아 건안 3년(202)이었다. 이 이후 손권은 유반을 막기위해 해혼 건창 및 여섯현을 묶어 태사자를 건창도위로 삼아 부임시켰다. 이로 인해서 잠시 유반의 공격이 주춤하기는 했으나 <삼국지 오서 태사자전>을 참고하여 보면 태사자가 죽은 건안 11년(206)에 까지 유반을 막았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 둘의 싸움은 꽤나 장기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여러가지 교전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중요한 것은 이 두가지로 여겨지므로 나머지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맺음말.

유표는 분명 현명한 군주와 우둔한 군주의 양면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형주를 학자들의 유토피아로 만들어 유학의 장려를 돕고 형주의 모든 지배권을 장악했던 그의 모습은 군주로서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반대로 후계자 선정에 실패하고 중원의 패권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유유부단하고 확실한 태도를 보이지 못해 방관자로 남았던 그의 모습은 군주로서 실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이 양면의 중용을 선택하여 한 마디로 유표를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난세를 살아간 난세에 어울리지 않는 치세의 군주 유표.

여기서 필자는 유표에 대한 평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유표를 옹호하던 배척하던 그것은 독자들의 몫일 것이라고 믿으며 나름대로 중용을 찾으려 했던 모습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안고 여기서 이만 글을 마무리 짓는다.

2003년 9월 26일 푸른 바다가 세상을 비추는 천공의 작업실에서.
* 정삼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3-10-07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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