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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의 황조.2003-10-07 21:09:46
 천공하후패http://cafe.daum.net/qldnjfeh


강하의 황조.


머리말.

《삼국지연의》에서 황조는 인물을 감별할 줄 모르고 감정에 의해서 일처리를 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형의 죽음과 감녕과 소비를 푸대접 한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은 모두 《삼국지연의》의 예술적인 허구로 모두 역사적인 근거가 있으나 모두 문학적 색채에 의해서 과장되고 덧붙여진 것이라 사실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삼국지연의》를 통해서는 황조에 대해 알 수 없다.

이 점은 《삼국지》를 봐도 마찬가지이다. 《삼국지》에서 황조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오서》에 기록되어있다. 황조는 오나라의 초대 황제인 손권의 부친인 손견을 죽인 인물이기 때문에 오나라는 황조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 오나라의 기록은 진수가 《삼국지》를 편찬할 때 오나라의 사료를 취했기 때문에 그 기록이 대부분 오나라 중심적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황조에 대한 모든 기록은 오나라 중심적일 수 밖에없다. 그러므로 《삼국지》에서 황조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사실은 취하고 묘사는 버려야된다. 그런 작업을 거친 후에야 비로서 황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다.

그렇기에 필자는 지금부터 사료 속에 중용을 취하여 황조에 대해 알리고자 한다. 부디 이 글이 중용을 잃지 않고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황조를 알게 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손씨와의 지독한 악연.

《삼국지》에서 황조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오서 손견전》에 기록되어있는 원술과 유표 사이에서 일어난 양양전투 때이다. 당시 유표는 형주자사로서 양양성에 주둔해있었고 원술은 남양성을 점거하여 포악한 정치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남양군은 형주에 속한 군으로서 형주자사였던 유표의 감찰권이 미치는 지역이었고, 원술은 사세삼공의 가문을 이용해서 세력을 확장하려던 군벌이었기에 이 둘의 대결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당시 손견은 원술의 부하였고 황조는 유표의 부하였다. 원술은 손견에게 군사를 주어 유표를 공격하게 했고 유표는 황조에게 군사를 주어 번성(양양성의 북쪽에 위치한 요새)과 등성(양양성의 서북쪽에 위치한 현 곧 남양군 등현)의 사이에서 맞아 싸우게 했다. 처음 황조는 손견의 군세를 이기지 못하고 패하였다. 황조는 한수를 건너 현산(양양성 남쪽의 요새 곧 현수산)에 군대를 주둔했다. 손견은 양양성을 포위하고 현산을 순시하던 도중 황조의 군사들이 쏜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황조는 대장을 잃은 군대를 격파하여 양양성을 지켜냈다. 그리고 이렇게 손씨와의 지독한 악연은 시작되었다.

초평 3년(192)에서 초평 4년(193)에 일어난 양양전투를 이김으로서 유표는 형주를 지켜낼 수 있었다. 이 해 장안을 점거한 이각과 곽사에 의해서 유표는 진남장군 형주목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황조는 양양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강하태수가 되었다.

건안 4년(199). 원술에게서 독립한 손책은 여강태수 유훈을 격파하고 정보와 한당, 주유 등과 함께 강하군를 공격한 이후 예장군과 여릉군으로 돌아와 이 두 곳을 평정했다. 이 사실은 《오서 손책전》과 《오서 주유전》등에 기록되어있는데 자못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손책이 원술과의 관계를 끊고 독립한 이후 얼마지나지 않아 원술은 조조에 의해 패하고 죽고만다. 원술이 죽은 이후 장사 양홍과 대장 장훈 등이 손책의 세력으로 들어가기 위해 진군했지만 여강태수 유훈은 이들을 공격하여 이들의 세력을 흡수한 일이 있다. 손책은 유훈의 세력이 강대했으므로 잠시 유훈과 동맹을 맺어 그를 안심시킨 뒤에 유훈으로 하여금 상료를 공격하게 했고 손책은 빈 여강군을 공격하여 여강군을 얻었다. 이전에 손책이 원술의 부하로 있을 때 예장군을 분리하여 여릉군으로 삼아 손책은 회계태수를, 사촌인 손분은 예장태수를, 손분의 동생인 손보를 여릉태수를, 단양의 주치를 오군태수를 맡아 이 일대를 다스린 적이 있었는데 이 때에는 원술의 밑에서 활동하던 때이므로 그 지배권이 손책에게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여강태수 유훈을 격파한 이후 예장군과 여릉군으로 돌아와 이곳이 지배권을 강화했었다.

그런데 양주일대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손책이 왜 여강태수 유훈을 격파한 이후 주유를 중호군 강하태수로 삼아 형주군에 속한 강하군을 공격했던 것일까? 게다가 《오서 주유전》의 주석에 따르면 이후 예장군과 여릉군은 완전히 평정하게 얻었지만 그 전에 공격했던 강하군은 얻을 수 없었다고 했다. 왜 갑자기 손책은 양주에서 형주로 눈을 돌렸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강하군에 황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황조는 손책의 입장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이다. 그러므로 강하군을 공략하여 황조를 죽여서 원수를 값아야했다. 하지만 황조는 앞에서도 보았듯 그렇게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손책이 정보와 한당 그리고 주유 등의 명장들을 이끌고 강하군을 공격했지만 강하군을 점령하지 못했다. 강하태수 황조의 힘이었다.

이렇게 손책의 강하군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한동안 황조와 손씨의 대결은 없었다. 이유인즉 손책이 허공의 자객의 습격으로 죽고 손책의 동생인 손권이 어린 나이에 세력을 이어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때가 건안 5년(200)이다. 손권은 세력을 이어받은 이후 부하들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거나 지배권이 약화된 모든 곳을 순시하면서 지배권 강화에 힘썼다. 그리고 세력이 안정화되자 그는 형 손책이 하지 못했던 부친 손견의 복수를 시작했다.

건안 8년(203). 손권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황조를 토벌하러 갔다. 황조의 수군을 격파시켰지만 성만큼은 함락시킬 수 없어 곧 철군했다.

건안 11년(206). 이번엔 황조가 부장인 등룡을 보내 시상을 공격했다. 등룡은 병사 수천명을 동원하여 시상현을 공격했지만 주유가 등룡를 격파하고 사로잡아 오군으로 보냈다. 한편《오서 서성전》에서는 또 다른 황조의 시상현의 진출 기록이 보인다. 당시 시상현에는 별무사마 서성이 병사 5백과 함께 주둔해있었다. 황조는 아들 황사에게 수천의 군사를 주어 시상현을 공격하게 하였다. 서성은 성을 공격해오던 황사의 군대에 맞서 싸워 황사의 병사 1천에 부상을 입혔고 승세가 보이자 성문을 열고 나가 싸워 황사의 군대를 무찔렀다. 그 후 황사는 시상현을 공격해오지 않았다.

건안 12년(207). 손권은 또 군사를 일으켜 강하군을 공격했는데 성은 함락하지 못하고 황조의 관리와 백성을 포로로 잡는데 그쳤다.

이렇게 서로 적절한 공방을 펼치던 황조와 손권은 건안 13년(208)에 비로서 생사를 건 결전을 벌이게 된다. 손권은 앞서 행한 두 차례의 공격을 통해서 황조를 쉽게 공격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많은 준비를 하게 되는데 이 준비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바로 장강의 해적으로 유명한 감녕이었다. 감녕은 유표와 황조가 중임하지 않자 황조 정벌에 혈안이 되어있던 손권에게로 가 황조의 허실을 알려 공격의 기초를 제공했다.

《오서 감녕전》을 통해서 당시 황조의 상황을 살펴보자.

『"황조는 지금 연로하여 혼미함이 매우 심하고, 재물과 식량이 부족하며, 수하의 사람들은 그를 속이고 재화를 탐하며, 부하 장수들의 이익을 빼앗아 장수들의 마음에는 원한이 있고, 배나 무기는 버려진 채 정리되어 있지 않으며, 농경에는 게으르고 군대는 엄한 규율이 없습니다. 공께서 만일 지금 간다면 그들의 패배는 필연적일 것입니다."』

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황조의 나이가 많고 세력이 많이 와해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손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손견과의 전투에서부터 입증되었듯 황조의 수성 실력은 굉장했다. 현산에서 손견을 죽인 것도 그러하거니와 손책의 공격을 막고 두 차례에 걸친 손권의 공격을 모두 막아 성을 지킨 그의 모습은 그가 수성에 밝았음을 의미한다. 손권에게 있어서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손권은 주유, 여몽, 능통, 동습, 주태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강하군을 공격했다. 여몽과 능통 동습은 선봉대를 조직하여 수군을 통해 공격을 하고 손권 등은 육군을 통해서 공격을 했다. 황조는 손권이 군대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자 도독 진취와 장수 장석 등에게 수군을 통솔하게 했으며 자신은 성을 지켰다. 황조는 면구(곧 하구이다. 한수가 장강으로 흘러가느 입구에 있으므로 면구라 한다.)에 몽충(길고 가느다란 배로서 화살과 도를 막을 수 있게 쇠가죽으로 선체 감싸고 나아가 적의 전함에 충돌하여 공격할 수 있게 만든 배이다.) 두 척을 비켜놓고 몽충을 주위의 큰 종려나무에 묶어 고정시킨 다음 각각 천명씩 궁병을 배치하여 손권의 수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워낙 수비가 견고하여 손권의 수군은 이 방어선을 쉽게 뚫지 못하였다. 이때 동습은 능통과 함께 결사대 1백명을 구성하여 큰 배를 통해서 몽충으로 다가가 묶여진 새-끼줄을 끊어 몽충을 포류하게 했다. 그 후 여몽은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황조의 군대를 크게 격파시키고 도독 진취의 목을 베었다. 선봉대였던 능통 역시 장수 장석을 베는 공을 세웠다. 그리고 곧 여몽과 능통, 동습군은 성을 공격했고 패배를 예감한 황조는 성을 버리고 다라나다 기병 풍칙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로서 황조와 손씨의 오래되고 지독한 악연은 손권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서 여몽은 횡야중랑장으로 임명되었고 1천만전을 하사받았으며 능통은 승렬도위로 승진하고 주유는 전부대독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은 모두 그 공이 인정되어 승진하고 대우받았다. 이것은 이 전투가 얼마나 크고 오랜 숙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맺음말.

분명 황조를 명장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감녕이 지적한 바대로 그는 말년에 이르러 세력의 기강을 바로잡지 못했고 그 결과 손권에게 패하고 말았으니 명장이라는 칭호는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삼대에 걸친 손씨의 공격을 막아 강하군을 지킨 그는 유표와 형주의 든든한 동쪽의 수호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황조는 또 다른 강하군의 명장 문빙과도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명장이 되지 못할 지언정 졸장은 될 수 없는 사내. 강하의 또 다른 신화 황조.

우린 그의 이러한 면을 다시 봐야되지 않을까.

덧글 1개
 명사문화 황조가 이런 면도 지닌 인물이었군요. 글 잘 읽었습니다. 2003/10/0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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