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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공하후패(2001-01-08 00:24:58, Hit : 2975, Vote : 217
 제갈량전(퍼왔습니다.)
-제갈양전(諸葛亮傳)

제갈양은 자가 공명(孔明)이고 낭야군 양도현(陽都縣) 사람이며, 한의 사예교위 제갈풍(諸葛豊)의 후예이다.
부친 제갈규(諸葛珪)는 자가 군공(君貢)이며, 한대 말기에 태산군(太山郡)의 승(丞)을 지냈다.
제갈양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다. 그는 제갈양과 제갈균(諸葛均 ;제갈양의 동생)을 데리고 부임했다.
마침 한의 조정에서는 주호(朱皓)를 선출하여 제갈현을 대신하도록 했다. 제갈현은 평소 형주목인 유표와 두터운
교분이 있었으므로 그에게로 가서 의탁했다. 제갈현이 죽자, 제갈양은 직접 밭에서 농사를 지었으며,
'양보음'을 노래하기를 좋아했다.

제갈양은 신장이 8척이었으며, 항상 자신을 관중(管仲), 악의(樂毅)에 비유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받아 들이는 자가 없었다.
오직 박릉군(博陵郡)의 최주평(崔州平), 영천군(潁川郡)의 서서(徐庶)만이 제갈양과 친교를 맺었으며, 확실히 이와 같다고 말했다.

그 당시 유비는 신야(新野)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서가 유비를 만났는데, 유비는 서서를 인물감으로 생각했다. 서서가 유비에게 말했다.

"제갈공명은 와룡(臥龍)입니다. 장군께서는 그를 만나보기를 원하십니까?"

유비가 말했다.

"당신은 그와 함께 왔습니까?"

서서가 말했다.

"이 사람은 가서 볼 수는 있어도 억지로 이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몸을 굽혀 수레로 찾아가야만 됩니다."

이 때문에 유비는 가서 제갈양을 방무했는데, 모두 세 차례 찾아간 이후에야 비로소 만났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들을 물리고
말했다.

"한왕실은 기울고 봉괴되었으며 간신들이 황제의 명령을 도용하여 황제는 몽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덕행과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천하에 대의(大義)를 펼치려고 했지만, 지혜와 지모가 부족하기 때문에 좌절하고 실패하여 오늘 이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뜻만은 아직 버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갈양이 대답했다.

"동탁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한 이래로 호거들이 일제히 일어나 주를 넘고 군을 이은 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조조는 원소와
비교하여 명성은 희미하고 병력은 박약하지만, 조조가 원소를 무찌르고 약자에서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단지 시운(時運)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의 지모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조는 이미 백만 병력을 끌어안고 천자를 끼고 제후들에게 호령하고 있으니, 이는
확실히 그와 역량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손권은 강동을 지배한 지 벌써 삼대가 지났으며, 국가는 견고하고 백성들은 의지하며,
현명한 사람이나 재간 있는 사람은 그에게 임명되었으니, 이는 그를 밖에서 원조할 수는 있지만 도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형주는
북쪽으로는 한수와 면수가 있어 경제적인 이익이 남해에까지 이르고, 동쪽으로는 오군(吳郡), 회계군(會稽郡)과 연접해 있으며, 서쪽
으로는 파군(巴郡), 촉군(蜀郡)으로 통하니, 이는 무력을 세울 만한 나라이지만 그곳의 주인(유표)은 지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하늘이 장군에게 사용하도록 주는 것일텐데, 장군께서는 뜻이 있습니까? 익주는 요새가 견고하고 옥토가 천 리나 되므로 천연의 보고이며,
고조는 이것을 기초로 하여 제업(帝業)을 세우셨습니다. 그 땅의 주인인 유장(劉障)은 우매하고 유약하고, 장로(張魯)는 북쪽에서 그를
위협하고 있으며, 인구가 많고 국가가 부유하지만 백성들을 보실피는 일에 마음을 둘 줄 모르고 있으므로 지혜와 재능이 있는 사람은
현명한 군주를 얻기 원합니다. 장군은 이미 황실의 후예이고 신의는 천하에 빛나며 영웅들을 널리 불러 받아들이고, 갈증이 나는 것처럼
현인들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만일 형주와 익주를 점거하여 그 요충지를 지키고 서쪽으로는 각 민족과 조화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이월(夷越)
을 위로하며, 밖으로는 손권과 맹약을 맺고, 안으로는 정치를 개혁할 수 있어서 천하에 변화가 생긴다면, 한 명의 상장(上將)에게 명하여
형주의 군대를 완현(宛縣)과 낙양으로 진군하도록 하고, 장군자신은 익주의 병력을 이끌고 진천(秦川)으로 출격한다면, 백성들이 어찌 감히
대그릇에 담은 밥과 병에 넣은 장으로써 장군을 환영하지 않겠습니까? 실제 상황이 이와 같다면 패업은 성취될 것이고, 한왕실은 부흥할
것입니다."

유비가 말했다.

"좋습니다!"

이로부터 유비는 제갈양과의 정이 나날이 친밀해졌다. 관우, 장비 등이 기뻐하지 않았으므로, 유비는 그들에게 설명하며 말했다.

"나에게 공명이 있는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시는 언급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관우, 장비는 곧 논의를 그만두었다.

유표의 장남 유기(劉琦) 또한 제갈양을 매우 중요시했다. 유표는 후처의 말을 듣고 작은 아들 유종(劉琮)을 사랑하고 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기는 항상 제갈양과 더불어 자신을 안전하게 할 방법을 상의하려고 했지만, 제갈양은 항상 그것을 거절하고 함께 계획을 도모
하지 않았다. 유기는 그래서 제갈양을 데리고 후원을 유람하다가 함께 높은 누각에 올라 연회를 여는 사이에 사람들에게 사다리를 치우도록
하고 기회를 틈타 제갈양에게 말했다.

"오늘은 위로는 하늘에 닿지 않고 아래로는 땅에 닿지 않습니다. 말은 당신 입에서 나와 내 귀로 들어올 것입니다.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제갈양이 대답하여 말했다.

"당신은 신생(申生 : 춘추시대 진나라 태자)이 나라 안에 있다가 위험하게 되었고, 중이(重耳)가 나라 밖에 있어 안전하게 된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유기는 마음으로 그 의미를 깨닫고 수도 밖으로 나갈 계획을 은밀히 세웠다. 마침 강하태수 황조(黃祖)가 죽었으므로 밖으로 나가 곧 강하
태수가 되었다. 갑자기 유표가 세상을 떠났고, 유종은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 투항할 것을 청했다. 유비는
번성에서 이 소식을 듣고 그의 부대를 인솔하여 남쪽으로 갔으며, 제갈양과 서서가 함께 그를 따랐지만, 조조의 추격을 받아 패하고
서서의 어머니가 조조의 포로가 되었다. 서서는 유비에게 이별을 알리고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본래 장군과 함께 왕업, 패업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은 이 일촌 사방의 장소에서였습니다. 지금 벌써 노모를 잃어 마음은 혼란스럽
습니다. 당신의 사업에 이익이 없습니다. 이로부터 헤어지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조조가 있는 곳으로 갔다.

유비가 하구(夏口)까지 오자 제갈양이 말했다.

"사태는 긴급합니다. 청컨대 명령을 받들어 손장군에게 구원을 요청하도록 해주십시오."

그 당시 손권은 군대를 모아 시상(柴桑)에 있으면서 싸움의 성패를 관망하였다. 제갈양이 손권을 설득하여 말했다.

"천하가 혼란스러워지자 장군께서는 병사를 일으켜 강동을 점거하게 되었고, 유예주 또한 한수 이남에서 군대를 모아 조조와 함께 천하를
다투구 있습니다. 지금 조조는 큰 혼란을 끊어 대략 평정을 끝내고 형주를 격파하여 위세를 천하에 떨치고 있습니다. 영웅이 무력을 사용할
땅이 없기 때문에 유예주께서는 이곳까지 달려온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역량을 헤아리고 이 사태에 대처하셔야 합니다. 만일 오,월의 병력으로
중국과 대항할 수 있다면,즉시 국교를 단절하는 것만 못하고, 만일 대항할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무기를 방치하고 갑옷을 묶고 북쪽을 보고
신하라 하며 투항하지 않습니까! 지금 장군은 밖으로는 복종이라는 이름에 의탁하고 있지만 내심으로는 미룬 계책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데
사태가 위급해져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재앙은 매우 빨리 닥칠 것입니다."

손권이 말해따.

"만일 당신 말과 같다면, 유예주는 무엇 때무에 조조에게 투항하지 않습니까?"

제갈양이 말했다.

"전횡(田橫)은 제나라의 장수일 뿐인데 절조를 지켜 굴욕적인 투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유예주는 왕실의 후예이며 걸출한 재능은
세상을 덮었고, 많은 선비들이 우러러 흠모하는 것은 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 같은데, 만일 일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곧 하늘의
뜻인 것입니다. 어찌 다시 조조의 신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손권은 발끈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모든 오의 토지와 10만 병사를 들어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나의 생각은 결정되었습니다! 유예주가 아니면
조조를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없지만, 유예주는 막 패한 이후이니 어떻게 강대한 적을 대항할 수 있습니까?"

제갈양이 말했다.

"유예주의 군대는 비록 장판(長阪)에서 패배했지만, 현재 군대로 돌아온 병사와 관우의 수군 정예병사 만 명이 있습니다. 유기가 강하의
병사들을 합쳐도 만 명보다는 적을 것입니다. 조조의 군대는 먼 길을 왔으므로 피곤하고 지쳐 있습니다. 듣건대 예주를 추격하여 날랜 기병이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3백여 리를 달려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강한 화살에서 떠난 화살도 그 마지막은 노나라의 영주를 뚫을 수 없다'
는 상태인 것입니다. 때문에 병법에서는 이와 같이 하는 것을 꺼리며, '반드시 상장군이 다치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북방 사람들은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또 형주의 백성들이 조조에게 의탁하고 있는 것은 병력에 압박당한 결과이지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장군께서 진실로 용맹한 장수에게 명하여 수만 명의 병사를 인솔하도록하여 예주와 협력한다면 틀림없이 조조의 군대를
격파시킬 것입니다. 조조 군대가 격파되면, 틀림없이 북쪽으로 돌아갈 것이고, 이와 같이 되면 형주와 오의 세력은 강대해져 삼자가 정립
하는 상황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의 관건은 오늘에 있습니다."

손권은 매우 기뻐하며 즉시 주유(周瑜), 정보(程普), 노숙(魯肅) 등 수군 3만 명을 파견하여, 제갈양을 따라 유비가 있는 곳으로 가서 힘을
합쳐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조조는 적벽(赤壁)에서 패하고 군대를 이끌고 업성으로 돌아갔다. 유비는 그래서 강남을 수복했고,
제갈양을 군사중랑장으로 임명하여 영릉(零陵), 계양(桂陽), 장사(長沙) 세 군을 다스리도록 하였으며, 그 부세를 조달하여 군용물자를
충실하게 했다.

건안 16년(211), 익주목 유장이 법정(法正)을 보내 유비를 영접하고, 장로를 공격하도록 했다. 제갈양은 관우와 형주를 지키고 있었다.
유비는 가맹에서 돌아와 유장을 공격했고, 제갈양은 장비, 조운 등과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강에 인접해 있는 각 군현을 나누어
평정하고 나서 유비와 함께 성도를 포위했다. 성도가 평정되자, 제갈양을 군사장군으로 임명하고, 좌장군부사(左將軍腑事 : 그 당시 유비는
좌장군이었음)를 대리하도록 했다. 유비가 출정할 때, 제갈양은 항상 성도에 남아 지키면서 식량과 군사물자를 충분하게 했다.

건안 26년(221), 신하들은 유비에게 제(帝)로 칭할 것을 권유했지만, 유비는 허락하지 않았다. 제갈양이 권유하며 말했다.

"옛날 오한(吳漢), 경감(耿龕) 등이 처음 세조[광무제]에게 제위에 즉위할 것을 권하자, 세조는 사양하였는데, 앞뒤로 네 번쯤 됩니다.
경순(耿純)이 말하기를, '천하의 영웅들은 당신을 매우 우러르며 당신이 갈망하는 바를 얻기를 바랍니다. 만일 당신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다면, 사대부들은 각자 돌아가 주인을 찾을 것이니 다시 당신을 따를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세조는 경순의
말이 매우 깊음을 느끼고 곹 승낙을 했습니다. 지금 조조가 한조를 찬탈하고, 전국에 주인이 없게 되었습니다. 대왕 당신은 유씨의 후예이며,
그 핏줄을 계승하여 일어났으므로 오늘 황제의 지위에 즉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대부들이 대왕을 따라 장기간 고난을 겪은 것은 또한
경순의 말처럼 작은 공로를 얻기를 희망하는 것뿐입니다."

유비는 그래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제갈양을 승상으로 임명했다. 그 책서(策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 짐은 황실의 불행을 만나 황제의 지위를 공손히 계승하여 두려워하고 근신하며 감히 편안히 있지 않았으며, 백성들의 생황을 안정시키기를
윈한는데, 아직 안정을 얻을 수 없음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 승상 제갈양은 짐의 마음을 이해하고 나태함이 없이 짐의 결점을 보좌하고
짐을 도와 공덕을 드날려 천하를 비추도록 하라. 그대는 면려해야 한자.

제갈양은 승상의 신분으로 상서(尙書)의 사무를 담당하고 가절이 되었다. 장비가 죽은 후, 사예교위를 겸임했다.

장무 3년(223) 봄, 유비는 영안(永安)에서 병세가 위중했으므로 성도에서 제갈양을 불러와 뒷일을 부탁했다. 유비는 제갈양에게 말했다.

"당신의 재능은 조비의 열 배는 되나, 틀림없이 국가를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고, 결국에는 대사업을 완성시킬 것입니다. 만일 후계자가
보좌할 만한 사람이라면 그를 보좌하고, 만일 그가 재능이 없다면 당신이 스스로 취할 수 있습니다."

제갈양이 눈물을 흘리며 말해다.

"신은 감히 전력을 다하여 충정의 절개를 바치며 죽을 때까지 있겠습니다."

유비는 또 조서를 내려 후주 유선에게 말했다.

- 너는 승상과 함께 국가를 다스리고, 그를 부친과 같이 섬겨라.

건흥(建興) 원년(223), 제갈양을 무향후(武鄕候)로 봉하고, 부서를 세워 정사를 처리하도록 했다. 오래지 않아 또 익주목을 겸임했다. 정사는
크고 작은 것을 논하지 않고 모두 제갈양이 결정했다. 남중(南中)의 여러 군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지만, 제갈양은 방금 국상을 당했기 때문에
곧바로 병사를 파견하지 못했다. 또 오에 사자를 파견하여 화친을 맺어 동맹국이 되었다.

3년(225) 봄, 제갈양은 군대를 인솔하여 남쪽으로 정벌을 나서 이 해가을, 전부 평정시켰다. 군수물자가 새로 평정한 여러 군에서 나왔으므로
국가는 풍요해졌다. 그래서 군대를 정비하고 무예를 익혀 시기를 기다렸다가 큰 군사행동을 일으켰다.

5년(227), 군사들을 인솔하여 북쪽 한중에 주둔했는데, 출발할 때 상소를 올려 말했다.

- 선제께서는 창업을 절반도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지금 천하는 셋으로 분열되고, 익주는 피폐해졌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위급한 때입니다. 그러나 폐한를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은 궁궐 안에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충실한 장수들은
궁궐 밖에서 자신의 몸을 잊고 있습니다. 아마도 선제의 각별한 은총을 추모하고, 이것을 폐하에게 보답하려는 것입니다. 페하께서는 진실로
견문을 넓혀 선제께서 남긴 덕을 빛내고, 뜻있는 장수들의 기개를 넓혀야지, 공연히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고 잘못된 비유를 인용하여 충언이나
간언을 할 길을 막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궁중과 정부가 함께 한몸이 되어 상 주고 벌 주는 데 있어서 차이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만일 간사한
일을 하거나 법률을 범하고, 또 충성스럽고 착한 일을 한 자가 있다면 응당 담당 관청에 넘겨 그 형벌과 상을 논하도록 하여 폐하의 공평한
정치를 밝혀야지, 사사로운 정에 치우쳐 안팎으로 법률이 다르게 해서는 안됩니다. 시중, 시랑(侍郞) 곽유지(郭攸之), 비의, 동윤(童允)등은 모두
선량하고 착실하며, 뜻은 충실하고 성실합니다. 이 때문에 선제께서는 발탁하여 폐하께 남겨 주셨습니다. 제생각으로는, 궁중의 일은 크고
작음에 상관하지 말라고 모두 이 사람들과 상의한 연후에 시행하면, 반드시 부족한 점을 보충받아 널리 유익함이 될 수 있습니다. 장군 상총(尙寵)은
성질이나 행위가 선량하고 공평하며 군사에 밝아 옛날에 시험삼아 써 보시고는 선제께서 그를 유능하다고 칭찬했습니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상총은 독(督)에 추천되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군대 안의 일은 모두 이 사람과 상의한다면 틀림없이 군대를 화목하게 하고
우수한 자와 열등한 자가 알맞은 곳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하는 것, 이것이 전한이 흥성한 원인이며, 소인을
가까이 하고 어진 사람을 멀리 한 것, 이것이 후한이 쇠미해진 이유입니다. 선제께서 살아계실 때, 항상 신과 이 일을 논의하고, 일찍이 후한
말의 환제(桓帝)와 영제(靈帝)에 대하여 탄식하고 통한해 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시중, 상서, 장사(長史), 참군(參軍)은 모두 성실하고
선량하며 절개를 위해 죽을 신하들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하고 믿으시면 한왕실의 융성은 날을 헤아리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신은 본래 무관의 신분으로 남양(南陽)에서 직접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혼란스런 세상에서 구차하게 생명을 보존하면서 제후에게 가서 명성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다고 생각지 않으시고 송구스럽게도 몸소 몸을 굽히고 세 번이나 신의 오두막으로 찾아
오셔서, 저에게 당대의 상황을 물으셨습니다. 이 일로 부터 감격하여 선제께서 있는 곳으로 달려갈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후에 나라가
기울고 전복되려 하고 장판의 싸움에서 패배하였을 때에 임무를 맡았고, 위급하고 어려울 때에 명렁을 받들었는데, 그러부터 21년이 지났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의 신중함을 아셨기 때문에 임종할 때 신에게 큰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명령을 받은 이래, 밤낮으로 걱정하고 탄식하며 위탁
받은 일을 공적을 세우지 못하여 선제의 명철함을 손상시키게 될까 두려워하였고, 그 때문에 5월에 노수(盧水)를 건너 황무지로 깊숙이
들어 갔습니다. 지금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고, 군대와 무기도 이미 풍족하므로 마땅히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북쪽의 중원을 평정해야 합니다.
바라는 것은 우둔한 재능을 다하여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을 물리쳐 한왕실을 부흥시켜 옛 도읍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선제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하는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익과 손해를 헤아려 나아가 충언을 다하는 것응 곽유지, 비의, 동윤의 책임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신에게 적을 토벌하여 한왕실을 부흥
시킬 공적을 맡겨 주십시오. 만일 공적을 이루지 못한다면 신의 죄를 다스려 선제의 영전에 보고하십시오. 만일 덕을 흥성시켰다는 말이 없다면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태만함을 질책하여 그 허물을 분명히 하십시오. 폐하께서도 몸소 마음을 써서 신하들에게 선도(善道)를 자문하고 바른
말을 살펴 받아 들여 선제의 유언을 깊이 추념하십시오. 신은 큰 은혜를 받고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멀리 떠나려 하며
표(表)를 대하니 눈물이 흘러 말씀 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출발하여 면양(沔陽)에 주둔했다.

6년 (228) 봄, 제갈양은 사곡도(斜谷道)에서 나와 미현(眉縣)을 탈취하려고 선전하며, 조운, 등지(鄧芝)를 파견하여 의병으로 삼아 기곡(箕谷)에
진을 수축하도록 하였고, 위의 대장군 조진이 군사를 들어 저항했다. 제갈양 자신은 병사들을 인솔하여 기산을 공격했는데, 그 대오는 정연하고,
상주고 벌주는 것이 엄격하며, 호령은 분명했다. 남안(南安), 천수(天水), 안정(安定) 세 군이 위를 모반하고 제갈양에 호응하자 관중은
진동했다. 위의 명제가 서쪽으로 가서 장안을 지키고 장합(張合)에게 명하여 제갈양을 막도록 했다. 제갈양은 마속(馬謖)에게 군사들을 지휘
하여 선봉에 서도록 하여 가정(街亭)에서 장합과 싸우도록 했다. 마속은 제갈양의 지시를 어기고 군사 행동 중에 잘못을 범하여 장합에게 크게
격파되었다. 제갈양은 서현(西縣)의 천여 가구를 이주시키고 한중으로 돌아와 마속을 죽이고 병사들에게 사죄했다. 상소를 올려 말했다.

- 신은 미미한 재능으로 맡은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중요한 직무를 담당하여 직접 병사들을 인솔하여 출정했으나 삼군ㅇ르 격려하며 법규를
훈도할 수 없었고, 대사에 임하여 신중할 수 없었으며, 가정에서는 명령을 위반하는 과오를 범하고, 기곡에서는 근신하지 못하여 실책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 책임은 모두 신이 사람을 부당하게 쓴 데 있습니다. 신은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함이 없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어두운
면이 많습니다. <춘추>에서는 처벌은 군사에게 하는데, 신의 직무에 근거하여 이것은 타당한 것입니다. 청컨데 저 스스로 직위를 삼 등급
강등시켜 그 책임을 지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유선은 제갈양을 우장군으로 삼고, 승상의 직무를 대행하도록 하였으며, 총괄하는 직무는 이전과 같게 했다.

겨울, 제갈양은 또 산관(散關)을 나와 진창(陳倉)을 포위했는데, 조진이 이것을 막았으며, 제갈양은 식량이 다 떨어졌으므로 돌아왔다.
위나라 장수 왕쌍(王雙)이 기병을 이끌고 제갈양을 추격하였는데, 제갈양이 그와 싸워 격파시키고 왕쌍의 목을 베었다.

7년(229), 제갈양은 진식(陳式)을 파견하여 무도군(武都郡), 음평군(陰平郡)을 공격했다. 위나라 웅주자사 곽회(郭淮)가 군사를 이끌고 진식을
추격하자, 제갈양은 직접 건위(建威)까지 출격하였고, 곽회는 퇴각하여 웅주로 돌아뢌다. 그래서 두 군은 평정되었다.
제갈양에게 조서를 내렸다.

- 가정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은 마속의 책임이다. 그런데 그대는 그 책임을 자시에게 돌리고 심하게 폄하하고 자신을 억눌렀으며, 나 또한
그대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가 고수하려는 의견을 들어주었다. 작년에 그대는 무력을 빛냈고, 왕쌍의 머리를 베었다. 금년에는 다시
출정하여 곽회가 급히 달아나게 했다. 저족, 강족을 항복시키고 위로하였고, 무도군과 음평군을 다시 회복시켰다. 그대의 위풍은 흉악한 무리
들을 진압하고, 공훈은 혁혁하다. 지금 천하는 소란스럽고, 원수는 아직 제거되지 못했다. 그대는 중대 임무를 받아 나라의 중요한 일을
처리했는데, 오랜 기간 관직을 낮추고 있는 것은 큰 공훈을 발휘할 수 없는 원인이 된다. 오늘 그대를 승상으로 복직시키니, 그대는 사양하지 마라.

9년(231), 제갈양은 다시 기산으로 출격하였으며, 목우(木牛)를 이용하여 군수물자를 운반했는데, 식량이 다 떨어졌으므로 군대를 퇴각시켰다.
위의 장군 장합과 교전하여 장합을 활로 쏘아 죽였다.

12년(234) 봄, 제갈양은 전군을 인솔하여 사곡도에서 출병하였는데, 유마(流馬)로 군수물자를 운반하였으며, 무공현(武功縣) 오장현(五丈縣)을
점거하고, 사마선왕과 위남(渭南)에서 대치했다.

제갈양은 항상 식량이 계속 공급되지 않아 자기의 뜻을 펴지 못하게 될까 걱정하였으며, 이 때문에 병사를 나누어 둔전을 하여 장기간 주둔할
기초를 만들었다. 경작하는 자들은 위수 해안가에 거주하는 백성들 사이에 섞어 지냈는데, 백성들은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였고, 병사들은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았다. 서로 대치한 지 백여 일이 지났다. 그해 8월, 제갈양이 질병이 들어 군대 안에서 사망했는데, 당시 54세였다.
촉의 군대가 퇴각하자, 사마선왕은 제갈양의 군영과 보루, 거처를 일일이 순시하고 말했다.

"천하의 기재(奇才)구나!"

제갈양은 임종할 때 한중의 정군산(定軍山)에 매장하도록 유언했다. 산에 의지하여 묘지를 만들고, 묘지는 관을 넣을 수 있도록만 하며, 염할
때는 평상시 입던 옷으로 하고, 제사 용품은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조서를 내려 말했다.

- 그대는 문무의 재능을 갖추고, 지혜와 성실함을 지녔으며, 선제께서 고아를 의탁한 유언을 받아 짐을 보좌하여 사라져가는 국가를 계속
존재하도록 하고, 쇠미한 황실을 흥성시켰으며, 마음속에는 대란을 평정하려는 뜻이 있었다. 그리고 군대를 정돈하고 해마다 출병하여 정벌했다.
당신의 신같은 무예는 빛나고, 위세는 온 세상을 눌렀으며, 한 말에 특수한 공훈을 세웠는데, 이윤, 주공의 큰 공훈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어찌 애통하게도 사업이 거의 완성될 무렵에 질병으로 생명을 잃었는가! 짐은 슬프고 , 심장과 간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그대의 미덕을 숭상하고
그대의 공훈을 평가하고 살아 생전의 행적에 따라서 시호를 더하겠노라. 이것은 그대의 이름을 장래에 빛나게 하고, 역사책에 기재하여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지금 사지절과 중랑장 두경을 사자로 삼아 그대에게 승상무향후(丞相武鄕候)의 인수를 주고, 충무후(忠武候)라는
시호를 주도록 하겠노라. 그대의 영혼이 지각이 있다면 이러한 은총의 영광을 기뻐할 것이다. 아, 슬프도다! 아, 슾프도다!

이전에 제갈양이 유선에게 표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 성도에는 뽕나무 8백 그루, 메마른 땅 열다섯 이랑이 있으므로 제 자손의 생활은 이것으로 여유가 있습니다. 신이 밖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에는 특별히 조달해 줄 필요도 없고, 몸에 필요한 의식은 모두 관부에서 지급해 주므로 다른 산업을 경영하여 약간의 재산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신이 죽었을 때, 저희 집안에 남는 비단이 있게 하거나 밖에 여분의 재산이 있게 하여 페하의 은총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죽은 후에는 그가 말한 것과 같다.

제갈양은 선천적으로 기민하여 연발식 쇠노를 만들었고, 목우, 유마도 모두 그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병법을 응용하여 팔진도(八陳圖)를
만들었는데, 모두 그 요령을 얻었다고 한다. 제갈양의 말, 포고, 서간, 상주문에는 볼 만한 것이 많으므로 따로 한 문집으로 엮었다.

경요(景耀) 6년(263) 봄, 제갈양을 위해 면양에 사묘(祠廟)를 세우도록 하는 조서가 있었다.
가을, 위나라 진서장군 종회가 촉나라는 정벌하려고 한천(漢川)까지 왔을 때, 제갈양의 사묘에 제사지내고 군사들에게 제갈양 묘소 주변에서
가축을 방목하거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다.
제갈양의 동생 제갈균은 관직이 장수교위(長水校尉)까지 이르렀다. 제갈양의 아들 제갈첨(諸葛瞻)이 부친의 작위를 이었다.

그후 진나라의 진수가 말하길..

- 신 진수(陳壽)등 상주하여 말합니다. 신이 이전에 저작랑으로 있을때, 시중* 영중서감* 제복후 순욱(荀勖), 중서령*관내후 화교(和嶠)가
상주하여 저로 하여금 촉나라 승상 제갈양의 일을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제갈양은 위기에 처한 국가를 보좌하고 요충지에 의지하고 위나라에
투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보존하고 있는 그의 언론은 유실됨이 없는데, 이것은 실재로 위대한 진왕조의 광명이며 은덕이 지극하여
천하에 미친 결과로서, 옛날 이래로 이와 견줄 만한 조대는 없었습니다. 중복되는 것은 제외시키고 같은 종류의 문장을 나란히 놓아 24편으로
정리 했습니다.
제갈양은 어려서부터 출중한 재능과 영웅다운 기개를 갖고 있었고, 신장은 8척이었으며, 용모는 매우 위엄이 있었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은
그를 범상치 않은 인물로 평가했습니다. 한말, 전란을 만나 숙부 제갈현을 따라 난리를 피해 형주로 가서 직접 들에서 밭을 갈며, 입신양명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때 좌장군 유비가 제갈양이 특수한 재능을 갖춘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곧 오두막에 있는 제갈양을 세 번 찾아갔습니다.
제갈양은 유비의 영우다운 자태와 기개에 깊이 감동을 받아 흉금을 열고 진심을 토로하여 서로 두터운 정을 맺게 되었습니다.
위 무제가 형주로 남정했을때, 유종이 주를 바치고 투항하였으므로 유비는 세력을 잃고 병력이 적어 발을 세울 곳이 없었습니다. 제갈양은
이 당시 27세 였지만, 기책을 세워 직접 손권에게 사자로 가서 오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손권은 이전부터 유비를 존경하여 머리를 숙이고
있었고, 또 제갈양의 특출난 재능과 고아함을 보고는 그를 매우 존경하고 중요시하여 즉시 병사 3만 명을 파견하여 유비를 도왔습니다.
유비는 얻은 병사로 무제와 교전하여 위나라 군대를 대패시켰으며, 유리한 형세를 타고 승리를 하여 장강 이남 지역을 평정했습니다. 후에
유비는 서쪽으로 익주를 탈취했습니다. 익주는 평정되자, 제갈양을 군사장군으로 임명했습니다. 유비는 제라고 칭하고, 제갈양을 승상으로
제수했으며, 녹상서사로 임명했습니다. 유비가 죽자, 지위를 이은 유선이 어리고 유약하였으므로 정치가 크든 작든 간에 제갈양이 모두 결정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동오와 동맹을 맺고, 안으로는 남월을 평정하였으며, 법령을 세우고 제도를 폈으며, 군대를 정비하고 기계나
기술은 정묘한 정도까지 이르는 것을 추구했으며, 법령은 엄격하고 분명하고, 상주로 벌주는 것은 반드시 타당성이 있어 잘못이 없으면 징벌을
받지 않았고, 착한 일을 하지 않았으면 표창하지 않았고, 관리에 이르러서는 악함을 받는 사람이 없고, 사람들은 스스로 면려하며, 길에 떨어져
있는 것을 줍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침해하지 않았으므로 사회 기풍은 숙연해졌습니다.
이에, 제갈양의 숙원은 나아가서는 용이 비상하고 호랑이가 주시하는 것처럼 천하를 통일하려는 것이었고, 물러나서는 변방을 위협하여 천하를
동요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또 자신이 죽은 이후에 중원을 짓밟을 수 있고 위나라에 대항하는 자가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용병을 멈치지 않고 여러 차례 그의 무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제갈양의 재능은 군대를 통치하는 데는 뛰어났지만, 기책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열등했으며, 백성들을 다시리는 재간이 군사를 지휘하는 재능보다 우수했습니다. 그와 대적한 사람들 가운데 혹자는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었으며
게다가 병력의 많고 적음이 서로 같지 않았으며 나아가 공격하는 것과 지키는 것 두 가지 일이 있기 때문에 비록 해마다 출병했을지라도 승리를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전에 소하는 한신을 추천하고, 관중은 왕자성보를 천거했는데. 무두 자신의 장점만을 헤아렸던 것이 정치와 군사를
겸할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제갈양의 재능과 정치는 대체로 관중, 소하와 필적할 수 있지만, 당시의 맹장 중에는 왕자성보나 한신과 같은
자가 없었기 때문에 공업으로 하여금 늦어지게 했고, 대의는 실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천명이 돌아가는 비가 있어 치력을 갖고 다루 는
것이 불가능했었던 듯합니다.
청룡 2년 (234)에 제갈양은 병력을 인솔하여 무공(武功)으로 출전해 병사들을 나누어 둔전을 하도록 하여 오랫동안 주둔할 기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해 가을, 제갈양은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백성들은 그의 공덕을 추모하고, 그의 사적을 말로 엮었습니다. 오늘 양주, 익주의 백성으로
제갈양을 칭찬하는 자는 그 말이 귀에 남아있는 것 같이 말합니다. 비록 <시경><감당>에서 소공을 칭송하고 정나라 사람은 자산을 노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먼 과거의 비유로서 오늘의 상황을 나타낼 방법은 없습니다. 맹가는 말하기를, '안락함의 원칙을 갖고 백성들을 사역하는 경우에는
비록 피로하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며, 생존의 원칙을 갖고 사람들을 주살하면 비록 죽어도 분노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된 말입니다!
논의하는 자들 중에는 간혹 제갈양의 문장이 아름답지 않고 정녕 주도면밀함이 지나치다고 비평합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구요는 위대한
현인이며, 주공은 성인인데, 그들을 <상서>에 의거하여 고찰하면, 구요의 계책은 간략하고 전아하며, 주공의 고계는 번다하고 상세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구요는 순,우와 담소를 나누었고, 주공은 신하들과 맹세의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제갈양이 말한 대상은 평범한 사람들과
장사들이었기 때문에 문장에서 그 심오함을 추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이나 유언은 모두 모든 일에 바르게 대처하고 있으며,
공정하고 진실된 마음은 그의 문장 속에 나타나게 되었으니, 그안에서 그의 의도를 알기에 충분하며, 당대에도 유익한점이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폐하께서는 고대의 성왕을 잇도록 노력하며, 호탕하게 꺼리는 것이 없도록 하였기 때문에 비록 적국의 비방하는 말일지
라도 그 원문을 완전하게 보존하여 바꾸거나 피한 것이 없음으로써 넓게 통달한 이치를 날렸던 것입니다. 저는 삼가 제갈양의 저작을 초록하여
위의 것을 저작국에 주었습니다. 신 진수는 두렵고 불안합니다. 폐하께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립니다.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 죽을 죄를 저질렀
습니다. 태시(泰始) 10년(274) 2월 1일 계사(癸巳), 평양후(平陽候) 상(相) 신 진수가 상주합니다.





곽가봉효 (2001-01-17 17:11:37)
얼래..연의에서는 서서가 가고 제갈량이 들어왔는데 제갈량이 들어오고나서도 서서가 남아있었네
常山趙雲 (2001-05-27 20:56:57)
그렇다네여

강유전(퍼왔습니다.)
장비전(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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