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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공하후패(2001-01-06 15:18:10, Hit : 2490, Vote : 287
 관우전(퍼왔습니다.)
<<<정사 관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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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의 자(字)는 운장(雲長)으로 원래의 자는 장생(長生)이었으며, 하동(河東)

해현(解縣) 사람이었지만 탁군( 郡)으로 도망하여 망명했다.

선주(先主:유비)가 향리(鄕里)에서 무리를 모았을때 관우는 장비와 함께 이를 도왔다.

선주(先主)가 평원상(平原相)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하여 부곡(部曲)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선주(先主)는 잠을 잘 때에도

두 사람과 침상(寢牀)을 함께 했으며, 그 은혜는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관우와 장비는

여려 사람이 모여 앉아있는 자리에서도 하루종일 선주(先主)를 모시고 서 있었고,

또 그를 따라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도 어렵고 험한 것을 피하지 않았다.(1)

선주는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기습하여 죽이고 관우로 하여금 하비성(下 城)을

지키도록 하고, 태수(太守)의 일을 대신하도록 했다.(2)

그리고 선주(先主)는 소패(小沛)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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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촉기(蜀記)」에 전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조공(曹公:조조)이 유비와 함께 여포(呂布)를 하비성에서 포위했을 때 관우가

조공에게 아뢰어 여포 수하의 진의록(秦宜祿:벼슬이름인 듯)을 구원해줄 것과,

여포의 처(妻)를 아내로 맞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애걸했다. 조공(曹公)은 이를 허락했다.

여포를 격파하고나자 관우는 또다시 그 일을 조공(曹公)에게 여쭸다.

그러자 조공은 불쾌하게 생각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더니, 먼저 했던 약속을 어기고

여포의 처(妻)를 자기 곁에 두었다. 그러자 관우는 마음이 편치가 아니했다.

이것은 '위씨춘추(魏氏春秋)'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2)「위서(魏書)」에 이르기를, 관우를 임명하여 서주목(徐州牧)의 일을 대신하게

했다고 한다.

건안(建安) 5년, 조공(曹公)이 동쪽 정벌길에 나서자 선주(先主)는 패(敗)하여

원소(袁紹)에게로 달아났다. 조공은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갔는데, 그에게 편장군(偏將軍)의

벼슬을 내리고 예(禮)로써 심히 후하게 대우했다.

원소(袁紹)가 대장 안량(顔良)을 파견하여 동군태수(東郡太守) 유연(劉延)을

백마(白馬)에서 공격하자, 조공(曹公)은 장요(張遼)를 관우과 함께 선봉으로 삼아

맞서게 했다.

관우는 안량의 대장기와 마차의 덮개를 멀리서 바라보더니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나가서는 수만의 병사들 사이에 있는 안량을 찔러죽이고 그의 목을 베어 돌아왔다.

그러나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 능히 관우를 당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원소는 하는

수 없이 백마의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이에 조공(曹公)은 즉시 표(表)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했다.

처음에 조공은 관우의 사람됨이 용감하고 기상이 굳세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오래

머무를 뜻이 없는 것을 살피고 장요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그의 뜻을 시험해보게."라고

했다.

장요가 관우에게 그의 의중을 물어보니 관우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조공께서 나를 후히 대우해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유장군(劉將軍:유비)의 후한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하였으니

이를 어길 수는 없소. 그러니 여기 끝까지 머무를 수는 없고, 대신 다른 공을 세워

조공께 보답하고 떠날 것이오."라고 하였다.

장요가 이를 조공에게 보고하자 조공은 관우가 진정 의기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1)

얼마 안있어 관우가 안량을 죽이자 조공은 그가 반드시 떠날 것임을 알고 상을

무겁게 베풀었다.

그러나 관우는 그 상을 모두 봉(封)해 놓고 떠나감을 알리는 글을 올려놓은 후

선주(先主)가 있던 원소군으로 달아났다.

조공(曹公)의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관우를 추격하려 하였지만, 조공은 "누구나 각기

그 주인이 있는 것이니 추격하지 말라."(2)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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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자(傅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장요가 이를 태조(太祖:조조)에게 고하려 하다가 태조가 관우를 죽일까 두려워하여

말하지 못했는데, 이는 군주를 섬기는 도리가 아니었으므로 곧 탄식하며 말하기를,

"조공은 나의 군부(君父)요, 관우는 형제와 같다." 그러면서 관우가 한 말을 고했다.

태조는 "군주를 섬기는 근본을 잊지 않았으니 천하에 다시없을 의사(義士)로다.

그러면 언제쯤 떠날 것 같은가?"라고 묻자, 장요는 "관우는 공(公)의 은혜를 입었으니

공을 세워 이를 보답한 연후에 반드시 떠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2) 신(臣) 배송지(裵松之)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조공이 관우가 머무르지 않을 것을 알고도 내심 관우의 뜻을 아름답다고 여겼다.

떠나가는 관우를 추격하여 잡지않고 그가 갈수 있도록 내버려 뒀는데, 이는 왕의

으뜸가는 도량이라 아니할수 없음이니, 어느 누가 능히 이를 따를 수 있겠는가?

이것은 조공(曹公)의 용서하는 미덕의 결실이다.』

관우는 선주(先主)를 따라 유표(劉表)를 따르게 되었다. 유표가 죽자 조공(曹公)은

형주(荊州)를 정벌했는데, 선주는 번성(樊城)에서 남쪽으로 강을 건너려고 하며 별도로

관우를 보내 수백 척의 배를 이끌게 하여 강릉(江陵)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공은 추격을 계속하여 당양(當陽)의 장판(長阪)까지 이르게 되자, 선주는 한진(漢津)을

끼고 달려 관우의 배와 서로 만나게 되었고 함께 하구(夏口)에 이르게 되었다.(1)

손권(孫權)이 병력을 보내 선주를 도와 조공을 막도록 하자, 조공은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여 돌아갔다.

선주는 강남(江南)의 여러 군(郡:무릉·장사·영릉·계양 등)들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고,

공이 있는 자들에게 상을 내렸으며 관우를 양양태수(襄陽太守)·탕구장군( 寇將軍)으로

봉하여 강북에 주둔하게 했다.

선주가 서쪽으로 익주(益州) 원정길에 올랐을 때, 관우에게 형주(荊州)를 맡아 지키도록

하였다. 마초(馬超)가 선주에게로 투항하여 왔다는 소식을 듣자, 일찌기 그와 교류하며

지냈던 사람이 없었던 까닭에 관우는 제갈량(諸葛亮)에게 글을 써 보내 마초의

인물됨과 재주가 누구와 비교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제갈량은 관우의 오만함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곧 답장을 보내

"마맹기(馬孟起)는 문무(文武)를 겸비했고 그 능력은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일세의 호걸로써,

경포( 布)·팽월(彭越)과 같은 무리일 것이니 마땅히 익덕(益德)과 나란히 앞섬을 다툴 수

있을 것이고, 미염공(美髥公)의 절륜(絶倫)함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오."라고 했다.

관우는 수염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제갈량은 옛날부터 그를 '염(髥)'이라 했다.

관우는 서신(書信)을 살펴보더니 크게 기뻐하며 이를 빈객(賓客)들에게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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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촉기(蜀記)」에 이르기를,

처음에 유비가 허도(許都)에 있을 때 조공(曹公)과 함께 사냥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사냥 중에 무리가 흩어지자 관우는 유비에게 조공을 죽일 것을 권했지만 유비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하구(夏口)에 이르러 장강(長江)가를 떠도는 처지가 되자 관우는 화를 내며 말하기를,

"지난날 사냥을 할 때 만약 이 관우의 말을 들었다면 오늘과 같이 곤란한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안았을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비는 "그때는 다만 국가를 위해

조조의 재주를 아깝게 생각했을 뿐, 만약 천도(天道)가 옳은 것을 돕는 것이라면

이것이 복(福)에 어긋나는 것이었음을 알았겠는가?"라고 했다.

※ 신(臣) 배송지(裵松之)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유비는 후에 동승(董承) 등과 함께 모의하여 조공(曹公)을 죽일 것을 결의하였지만, 일이

사전에 탄로나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만약 유비가 국가를 위해 조공을 아깝게 생각했다면 그의 이러한 언행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는가! 관우가 이와 같이 권했을 때 이것을 옳게 여겨 듣지 않았던 것은 조공을 따르는

심복이나 친척의 무리가 많아, 미리 심사숙고하여 일을 하지 않고서는 이를 행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공이 비록 살해된다고 해도 자신의 몸이 반드시 징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을 했기 때문에 유비는 이를 하지 않은 것이었을 뿐, 어찌 조공을 아끼는

마음이 있었겠는가? 이미 지나간 일이었기에 단지 아름다운 말로 꾸며댄 것일 뿐이다.』

일찌기 관우는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그의 왼쪽 팔을 관통당한 일이 있었다.

뒷날 비록 낫기는 했지만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욱신거리고 아팠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화살 촉에 독(毒)이 있어 그것이 뼈속으로 들어가서 그런 것이니,

마땅히 팔을 가르고 뼈를 깎아내면 이 고통은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관우는 순순히 팔을 뻗어 의원에게 자신의 팔을 가를 것을 명했다. 이때 마침 관우는 여러

장수들을 초청하여 음식을 먹으며 서로 마주 대하고 있었는데, 피가 흘러내려 받쳐놓은

대야에 가득 넘쳤다. 그러나 관우는 구운 고기를 자르고 술을 마시며 담소(談笑)를

나눌 뿐 태연했다.

건안 24년, 선주(先主)는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관우에게 전장군(前將軍)의 벼슬을

내리고 절월(節鉞)을 내렸다. 그 해에 관우는 군사들을 이끌고 번성(樊城)의

조인(曹仁)을 공격했다.

그러자 조공(曹公)은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을 돕도록 했다. 가을이 되어 큰 장마비가

내리자 한수(漢水)가 범람하여 우금이 이끄는 칠군(七軍)이 모두 물 속에 잠기게 되었다.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하였는데, 관우는 또 장군 방덕(龐悳)의 목을 베었다.

양(梁)·협(陜)·육혼(陸渾)의 여러 도적들은 관우의 관인(官印)이나 봉호(封號)를 받아

그의 한 무리가 되었고, 관우의 위엄은 화하(華夏:중국을 일컫는 말)에 떨쳤다.

조공(曹公)은 그의 예봉(銳鋒)을 피해 허도(許都)를 떠날 것을 신하들과 논의하기까지

했으나,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장제(蔣濟) 등은 '관우가 뜻하는 바를 이루게 되는

것은 손권(孫權)이 반드시 원하는 일이 아닐 것이므로, 사람을 보내 손권에게 관우의

배후를 치도록 권하고 강남을 나누어 손권이 갖는 것을 허락해준다면 번성의 포위는

스스로 풀릴 것'이라고 주장하자 조공(曹公)은 이에 따랐다.

그런데 그 이전에 손권이 사람을 보내 그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혼인시킬 것을 제의한

적이 있었는데, 관우는 손권의 사자에게 모욕적인 말로 꾸짖으며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손권은 대노(大怒)했다.(1)

또한 남군태수(南郡太守) 미방( 芳)이 강릉(江陵)에 있었고 장군 부사인(傅士仁)은

공안(公安)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평소 관우가 자기들을 경시했던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우가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면서 미방과 부사인에게 군수물 자를 공급하는

일을 맡겼지만, 이들은 서로 최선을 다해 관우를 원조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우는 "돌아가면 마땅히 이들을 문책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고, 미방과

부사인은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손권이 몰래 미방과 부사인을 유혹하자

이들은 사람을 보내 손권을 따르겠다고 했다. 한편 조공(曹公)은 서황(徐晃)을 보내

조인(曹仁)을 구원했다.(2)

관우는 이것을 당해낼 수 없게 되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러나 손권이 이미 강릉을 점령하고 관리들과 처자식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관우의 군대는 흩어져버렸다.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공격하여 관우와 그의 아들

평(平)을 임저(臨沮)에서 참수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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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략(典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관우가 번성을 포위했을 때 손권은 원군(援軍)을 보내 그를 돕도록 했지만, 고의로 신속한

진군(進軍)을 늦추며 주부(主簿)만 먼저 보내 그의 명(命)을 알리게 했다.

관우는 원군의 도착이 늦어지는 것에 대해 화를 냈고, 또한 자기 스스로 우금(于禁) 등을

사로잡은 자신감에 "오소리 자식같은 것이 감히 이럴 수가 있는가? 번성을 쳐서 빼앗게

되었는데, 내가 너 따위를 멸하지 못하겠는가!"라고 욕했다.

손권이 이 말을 전해듣자 관우가 자신을 가볍게 보고 있음을 알고, 편지를 써서

관우에게 사과하고 자신이 직접 가겠다고 하였다.

※ 신(臣) 배송지(裵松之)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형주(荊州:관우)와 오(吳:손권)은 비록 겉으로는 화목한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의심하여 서로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밀히 군사를 일으켜 관우를 기습한 것이다.』

(2)「촉기(蜀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관우와 서황은 서로 아끼는 사이였으므로 먼거리에서도 서로 말을 주고 받았는데, 단지

평범한 이야기만을 주고 받을 뿐 군사(軍事)의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잠깐 대기하던

서황이 말에서 내리더니 명령을 내렸다.

"관운장의 머리를 얻어오는 자는 상금으로 천근을 주겠다."

관우는 놀라고 두려워하며 서황에게 "대형(大兄)! 이것이 무슨말씀이오?"하고 묻자,

서황은 "이는 국가의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3)「촉기(蜀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손권이 장수를 보내 관우를 공격하고 관우와 그의 아들 평(平)을 사로잡았다.

손권은 관우를 살려주어 조공을 유비의 적이 되게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좌우에서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리의 새-끼는 기를 수가 없습니다.

뒤에 반드시 해를 입히게 됩니다. 조공(曹公)도 관우를 즉시 제거하지 않을 것이므로 큰

우환거리가 될 것이어서, 도읍을 옮기는 일을 의논하 일이 생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찌 지금 그를 살려둘 수 있겠습니까?"

손권은 곧 참수해버렸다.

※ 신(臣) 배송지(裵松之)가「오서(吳書)」의 기록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손권은 장수 반장(潘璋)을 보내 관우의 달아나는 길을 가로막아 끊어 버렸다.

관우는 곧 죽게 되었다. 임저(臨沮)는 강릉에서 2∼3백리 떨어져 있는데, 불시에

관우를 죽였으니 어찌 생사(生死)를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오력(吳歷)」에는,

『손권이 관우의 머리를 조공(曹公)에게 보내자, 조공은 그의 주검을 제후의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박민호 (2001-01-06 23:47:10)

도겸전(퍼왔습니다.)
관로전(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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